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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책 리뷰

우리가 이 세상에 살게된 7가지 이유-3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

부조화는 대개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보다 출세하고 싶다, 좋은 옷을 입고 싶다, 맛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 아이들을 일류 학교에 보내고 싶다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끝없는 욕망의 늪이 우리들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만족할 줄 알면 마음에 제동이 걸리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제동이 풀린 마음으로 욕망의 늪에 빠진다. 그 결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청정한 보리(지혜)의 생활은 찾을 길이 없다.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예사로 배신한다.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속이고 봉건 사회의 머슴 같은 짓도 서슴지 않는다. 

 

지혜, 명예, 돈이 인생을 풍족하게 하는 것일까? 정말로 그럴까? 욕망이 생기면 평온한 생활을 기대하기는커녕 자신을 멸망으로 몰고 갈 때도 있다. 인간은 거짓 없는 생활 가운데에서만 올바른 마음의 싹이 눈뜨며 평안의 인생을 보낼 수 있다. 허영과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처럼 얻은 이 지상의 귀중한 생명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부지런히 살아가면 마음의 불안도 없어지고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조직 사회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다 같이 서로 감사의 마음과 은혜를 갚는 행위로 뭉칠 때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것처럼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과의 대립으로 발생하는 투쟁과 파괴의 사상을 필연적인 인류의 신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사상에 물든 마음은 부조화한 그늘이 되어 파멸의 길을 재촉한다. 부조화한 사념과 행위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화살처럼 짧은 것이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서 날마다 반성하는 생활로 우리의 마음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정화시켜야 한다. 신의 빛은 감사의 마음을 보은의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에게 쏟아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신우 빛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팔짱을 끼고 있어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선의의 운동은 퍼져가는 것이다. 

 

사회 현상에만 사로 잡히지 말고 내면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 조화야말로 신의 뜻이며, 그 조화는 신리에 맞는 실천 생활 이외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류는 모두 형제다. 지구라는 한 배에 탄 동시대의 동기생들이다. 피부색이나 민족의 종류는 각기 그 환경에 적합한 육체적 조건에 지나지 않으며 그 육체의 지배자인 의식 즉 영혼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형제자매들이다. 

 

태양의 빛과 열은 인류에게 평등하며 신불의 자비와 사랑도 또한 평등하다. 따라서 인종 차별의 편견은 신의 뜻이 아니다. 차별은 생활환경의 차이에서 생겨났다. 마음을 볼 수 없는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기 보호를 위한 봉건 제도적인 계급의식이다. 우리들은 하루빨리 내면의 마음을 깨달아 인간으로서 태어난 현생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자신의 전생을 알고 나쁜 업보를 바꾸려는 것이 인생 수행의 한 가지 목적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가 과거 세상에서 어떤 인물로 태어났던, 그것보다는 현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리에 맞는 상념과 행위만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물질 경제나 여러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성을 형성해 간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왕국을 만들 수 있다. 설령 자신의 전생이 왕이었다 하더라도 현세에 육체를 지니고 있는 자신이 삶의 가치를 알아내지 못하고 자아 욕망과 오관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이다. 신불(신, 부처님)의 자녀다운 자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현생의 가치는 달라진다. 상단계의 빛의 천사들, 여래나 보살들도 이 현상계에 육체를 지니게 되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수행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경제적인 고통이나 여러 가지 괴로움에 부딪치기도 하면서 인생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안게 된다. 그래서 과거 세계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대체로 승려나 학자로는 태어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의문과 회의가 일어나기 쉬운, 결코 안일하지 않는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붓다도 예수도 모세도 승려나 학자가 아니었다. 승려나 학자와 같은 작은 틀 속에 갇혀버릴 것을 예견하여 여래(메시아)들도 짐짓 고락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택해서 탄생한다. 그래서 여래는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는 일단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나 깨달은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저승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죽음에 임박해서 깨닫는 것은 너무 늦다. 육체가 건전할 때 신리를 깨달아 중생에게 가르쳐주고 조화 있는 인생을 다져 줄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여래가 이승에 태어났다. 하지만 인생 항로의 고난에 봉착하고 환경에 지배당하여 사명도 완수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친 경우도 있었다. 나의 수호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적인 물적 증거라는 것이 우선되기 쉬운데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신리에 관한 한 너무 과거의 기록에 사로잡히면 자칫 지식과 의지가 앞서서 자신의 본성을 상실하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을 상실하면 신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 

 

과거의 행적에 사로잡혀 문헌에만 의존하고 살면 학문적 탐구에 기울어져 마음이라는 자기의 본성을 잃기 쉽다. 자연 과학의 분야에서는 문헌이 큰 참고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신리에 관한 문제는 그 시대의 몰지각한 권력자에 의해서 왜곡된 경우가 많다. 불교도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건너오는 동안 그 나라의 전래 사상이 상당히 가미되고 말았다. 

 

따라서 불교도 기독교도 원래의 경전으로 돌아가기가 몹시 어렵게 되었다. 신의 뜻은 대자연의 법칙이므로 시대가 새롭게 오거나 낡은 세대 거나 상관없다. 진라란 헌 것도 새것도 없다. 불변인 것이다. 누구의 마음속에도 신불의 자녀로서의 신리는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신의 뜻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며,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고 항상 중도에 따라 욕심을 버린 생활을 계속해 가면 누구든지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긍지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나의 수호천사는 이렇게 보충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저세상 즉 실재계에 돌아가서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등으로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이미 엎지른 물이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늙어서 '아! 젊었을 때 좀 더 공부해 둘 것을' 하고 뉘우쳐 본들 소용없다.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태에 빠져 버리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신리를 깨닫고 정법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저승으로 돌아갈 때에는 '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제도했으면 좋았을걸' 그런 아쉬움을 남기게 될 것이다. 육체를 버려도 지상에 살 때와 마찬가지의 의식 상태에서 광자체라는 육체로 바뀌는 것이 우리들의 다음 세상이다. 따라서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의 생활 즉 상념과 행위의 일체가 하나하나 남김없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그래서 지상에서 저지른 죗값은 그곳에서 자신이 갚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자신이 자신을 재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후회하게 된다. 

 

유계 즉 죽음의 입구에서 우리는 지상에서 살았을 때의 선과 악을 낱낱이 가려 재판을 받게 된다. 신불이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게 된다. 그것은 신불의 자녀로서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가치를 잊고 조화롭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는 없고 검은 상념으로만 뒤덮여 있다. 이런 인간은 이 지상을 떠나 다음 세상에 가서도 똑같이 검은 상념의 세계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정화될 때까지 지옥계에서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옥도 자기 자신이 만들고 있던 세계일 뿐이다. 책임 전가는 용납되지 않는다. 책임을 전가시키면 그 고통은 더욱 커질 뿐이다. 따라서 행복을 얻는 지름길은 하루빨리 과거의 세상에서 지은 업(가르마)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그런 과오가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나쁜 성격을 고쳐가야 한다. 반성의 명상은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신불의 빛에 에워싸이게 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삶도 죽음도 없는 생명의 윤회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단지 육체라는 현상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육체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육체의 지배자인 영혼은 불변이며 다만 이승과 저승의 환경에 적합한 옷을 갈아입을 따름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생명의 불변을 불신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